[연재] 최태영 교수의 '슬기로운 군대생활' 7편 '대통령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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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최태영 교수의 '슬기로운 군대생활' 7편 '대통령 서거'
  • 북한선교신문
  • 승인 2020.10.2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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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선교신문에서는 최태영 영남신대 은퇴교수(조직신학)의 군 생활 이야기를 담은 '슬기로운 군대생활'을 연재합니다. 대한민국 생활과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최태영 영남신대 은퇴교수(조직신학).
최태영 영남신대 은퇴교수(조직신학).

1. 첫 휴가를 다녀온 후 진짜 센 훈련에 들어갔다. 하필이면 사단 대항 전투능력대회(정확한 명칭은 생각 안 남)가 그때 있었는데, 우리 사단에서는 당연히 수색대가 대표로 출전하게 되었고, 수색대대의 3개 중대 중에서 2개 중대는 GP에 투입된 상황이므로 우리 1중대가 거기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더 강한 훈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힘들었다. 여기에 비하면 신병교육대 훈련은 애들 장난이었었다. 그곳을 왜 훈련소라 하지 않고 교육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수색대의 장기(長技)가 구보(驅步)와 사격이라 하더니, 날마다 총을 쏘고 달렸다. 군대에서 하는 일이 수십, 수백 가지겠지만 그 모든 일의 중심은 구보와 사격이다. 빨리 가서 쏘는 것이다. 맨날 먹고, 뛰고, 쏘고, 또 먹고, 뛰고, 쏘았다. 

2. 다행히 사격은 잘 되었다. 서서 쏴, 앉아 쏴, 쪼그려 쏴, 엎드려 쏴, 달려가서 쏴, 야간사격 등등 나는 처음부터 모든 종류의 사격에서 거의 일등사수처럼 쏘았다. 그때는 M16이 막 보급될 때라던데, 그 총의 성능이 정말 좋았다. 총알이 어떻게 그렇게 원하는 곳으로 정확하게 날아가 박히는지 신기했다.

문제는 구보였다. 훈련 중 제일 힘든 것이 완전군장 10km 구보였다. 완전군장의 무게는 10kg이다. 그것을 짊어지고 철모를 쓰고, 소총을 들고 쉬지 않고 뛰는 것이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뛰는데, 날마다 시간이 단축되어야 했다. 첫날은 천천히 뛰는 것으로 시작했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은 숨이 찼다. 사흘째부터는 고역(苦役)이었다. 그다음 날부터는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속도가 되었다. 덩치 좋은 고참도 하나둘씩 퍽퍽 쓰러졌다. 소대장이 지프(Jeep)로 뒤따르면서 길바닥에 쓰러진 그들을 수습해 갔다. 

3. 나는 우리 소대에서 신체조건이 가장 열악했지만, 신병이었으므로 중간에 낙오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수색대원들은 다들 덩치도 크고 신장도 컸다. 그들과 비교해 다리가 짧은 내가 자꾸 처지니까, 고참들이 나를 제일 앞줄에 세웠다. 제일 앞줄에 서면 시야가 확 펼쳐지므로 뛰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속도를 못 내면 바로 뒤에 있는 고참이 엉덩이를 발로 찼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는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는 말이 생각났었다. 나는 말이 아닌데도 수시로 발로 차이면서, 어떤 때는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리면서 그 큰 덩치들과 보조를 맞추어 달리고 또 달렸다. 

4. 그렇게 전투보다 더 힘든 훈련을 받고, 사단 대항의 그 무슨 대회를 무사히 치르고 나자, 우리 중대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그것은 땅굴 수색 작전이었다. 그때까지 경기도 전방 지역에 북한이 판 땅굴이 몇 개 발굴되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온 세계의 이목이 쏠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땅굴이 강원도 양구에 있는 우리 사단 영역에도 있다고 의심되었다. 보초를 서던 사병들이 땅 밑에서 쿵쿵하고 땅굴을 파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즉시 땅굴 탐지(探知)팀이 꾸려져 현장에 파견되었고, 동시에 우리 수색대가 파견되었다. 땅굴이 발견되면 첫 번째로 할 일은 그 땅굴을 수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땅굴을 파 내려오던 북조선군이 거기에 지뢰(地雷)나 부비트랩(booby trap) 같은 폭발물을 설치해놓고 도망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수색대가 땅굴에 들어가서 수색을 하며 폭발물 같은 것을 제거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우리 중대는 땅굴 탐지팀 근방에 야영지를 확보하고, 수십 개의 텐트를 치고 머물면서, 한편으로는 땅굴 탐지팀을 위하여 경계근무를 서고, 또 한편으로는 땅굴의 모형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수색하는 훈련을 반복하였다. 

5. 이때부터 고참들의 불평이 많아졌다. 빨리 GP에 올라가야지 이 무슨 개고생이냐는 것이다. 사실 땅굴 수색의 일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우리의 주된 근무지는 GP였다. 하지만 나는 DMZ 안에 있는 GP에 대한 두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땅굴 수색의 일이 생겨서 GP로 가는 일이 미루어지고 있음을 은근히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할 수 있으면 그 위험한 곳에 안 가게 되기를 은근히 바랐었다. 그런데 GP 경험자들인 고참들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GP를 진짜 그리워하며 빨리 거기 가서 쉬고 싶다고 하였다. 내가 존경하고 따랐던 김 상병은 나의 불안을 덜어주려고 GP는 천국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는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그곳도 살만한 곳인가 보다는 생각은 들었었다. 

6. 고참들이 GP 타령하는 것을 듣는 동안 시간이 흘러 어느덧 추석이 가까이 왔다. 대대 본부에서 후방의 국민이 보내준 위문품을 우리에게 날라다 주었다. 위문품은 크게 두 종류인데 하나는 초코파이 같은 것이 가득 들어있는 종합 과자 세트이고, 다른 하나는 위문 편지였다. 위품 편지가 가득 담긴 종이상자를 받아든 왕고참이 희희낙락하며 상자를 개봉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편지 봉투를 하나하나 점검하며 배분하기 시작한다.

제일 인기 있는 편지는 여고생에게서 온 것이다. 그것은 전부 병장들 몫이 되었다. 나 같은 이등병에게는 남자 중고등학생에게서 온 것이 주어졌다. 열어보면 열이면 열, 그저 상투적인 내용이었다. 교실에서 단체로 위문 편지 쓰던 시절이 생각났다. 고참들은 편지들을 서로 돌려보며 깔깔거리며, 그중에 몇 개를 찜하고는 답장을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소대에서 연애편지 잘 쓰는 사병들이 고참들의 총애를 받으며 초코파이와 라면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불려갔으나 곧바로 퇴짜를 맞았다. 내 사상이 그들에게는 질색이란다. 사실 그때 나는 주님, 말씀, 기도, 은혜, 믿음, 이런 단어를 빼고는 생각도 못하고 글도 쓰지 못했었다. 

7. 이렇게 즐겁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GOP 철책선이 뚫렸다는 것이다. 북조선 무장공비 3명이 아군 철책선을 끊고 넘어온 흔적이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GOP 근무자들이 추석을 맞이하여 초코파이를 먹으며 향수에 젖어 있을 때를 노리고 철책선을 뚫었다는 결론이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땅굴 수색 훈련은 곧바로 중지되고 우리 수색대는 즉시 무장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되게 되었다. 여러 대의 군용 헬기가 우리가 주둔하고 있는 야영지로 날아와서 중대장을 비롯한 우리 부대원들을 싣고 무장공비가 이동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으로 날아갔다. 나를 비롯한 졸병 몇 명과 우리를 인솔하는 분대장(하사) 1명만 땅굴 탐지하는 현장에 남고 고참들은 전부 중무장한 후 헬기를 타고 떠났다. 

8. 어찌 됐건 이등병만 남게 된 며칠은 이등병 생활 중 최고로 안락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 3끼 때맞춰 야전 취사장에 가서 밥 먹고, 텐트로 돌아와서 양치하고, 머리 감고 몸도 씻고, 잡지도 읽고 라디오로 흘러간 유행가를 듣든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던가 하면서 시간을 채웠다.

한번은 라디오로 당시 가장 유명한 설교자인 순복음중앙교회 조용기 목사님의 카랑카랑한 설교를 들은 기억이 선명하다. 그분은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눈동자는 항상 땅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으시는데, 그 눈동자가 머무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하였다. 그 말씀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9. 우리 사단 전체가 무장공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였으나, 나를 비롯한 수색대 졸병들은 땅굴 탐지작업팀의 경비병 역할만 하면서 시간을 축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기상하여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으며 습관처럼 라디오를 켰는데, 다른 때와는 달리 느리고 비장(悲壯)한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이게 뭐야 하고 채널을 돌렸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채널도 똑같았다. 모든 라디오 채널이 한 가지 방송만 하는 듯했다. 이게 뭐지 하고 긴장한 채 듣고 있었더니 곡이 멈추면서 아나운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그리고는 장송곡(葬送曲)이 이어졌다. 충격(衝擊), 대 충격이었다.

그날은 멍한 가운데 종일 라디오에서 귀를 뗄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근대사에 최대의 족적(足跡)을 남긴 한 인물의 종말(終末)을 거기서 우연히 듣게 되었던 것이다.


최태영 교수는 경북고등학교, 서울대 중문학과(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장로회신학대학원 대학원(Th.M. Th.D.)을 졸업했습니다.

美 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Research Fellow) 과정을 거쳤고, 1990년 3월~2020년 8월까지 30년 동안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영남신대 은퇴교수입니다. 또 '교회를 위한 신학 발전'을 위해 연구하는 '교회신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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