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최태영 교수의 '슬기로운 군대생활' 12편 '김 상병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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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최태영 교수의 '슬기로운 군대생활' 12편 '김 상병의 기도'
  • 북한선교신문
  • 승인 2020.11.17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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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선교신문에서는 최태영 영남신대 은퇴교수(조직신학)의 군 생활 이야기를 담은 '슬기로운 군대생활'을 연재합니다. 대한민국 생활과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최태영 영남신대 은퇴교수(조직신학).
최태영 영남신대 은퇴교수(조직신학).

1. 김 상병은 우리 소대원 중에 위아래 모두로부터 신뢰받는 군인이었다. 고참들을 잘 섬기고 졸병들에게 엄하면서도 너그러웠다. 나에게는 후원자 역할을 해 주었고, 특히 내가 해야 할 일을 예비하고 있었다.

GP에 투입된 처음 얼마간 야간 경계근무를 함께 서면서 그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 하나가 ‘신앙전력화(信仰戰力化) 부대’다. 내가 신병교육대에서 교육을 마치고 수색대대 본부를 거쳐 중대 본부로 들어섰을 때 눈에 띄는 표지판이 있었다. ‘신앙전력화 부대’! 군대에서 웬 ‘신앙’일까? 의문을 가진 채 지나왔는데, 김 상병을 통해서 비로소 그 연유(緣由)를 알게 되었다. 

2. 김 상병은 군에 입대하기 얼마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다. 여자친구로부터 전도를 받은 후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GP 근무를 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대원(隊員)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심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군대라는 특수 사회의 졸병이었으므로 방법을 찾지 못하고 기도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갓 결혼한 GP 장(長) 곧 소대장의 부인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소대장은 자기 부인의 영향을 받아서 소대원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인 자기를 가까이해 주었다.

어느 날 그는 기회를 얻어 소대장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소대원들에게 믿음이 있으면 GP 근무를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는데, 소대장이 반색하며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작전을 나갈 때는 물론, 틈날 때마다 기도하게 했는데, 특히 김 상병에게 공적(公的) 기도를 시켰다. 

3. 소대장은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 상병의 신앙에 관한 제의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창의력이 있었다. 곧, GP에서 자체적으로 주일예배를 시작한 것이다. 초신자답지 않게 열정적이었다. 마치 자신은 GP 교회의 당회장이고, 김 상병은 전도사인 것처럼 운영하였다.

그러니까 소대장이 예배를 소집하여 전 소대원이 모이게 하고, 찬송 인도, 기도, 그리고 설교는 김 상병이 하고, 광고는 소대장이 하는 식이었다. 김 상병은 초신자라서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소명감,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감당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나 그 GP는 그해의 무사고 GP로 뽑히게 되었다. 그 후 대대장과 중대장이 GP를 방문하였고, 그때 소대장은 무사고 GP의 비결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멋있게 브리핑 했다. 크게 감동한 대대장이 우리 중대를 “신앙전력화 중대”로 나가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대장은 대대장의 인정을 받아 얼마 후 대대 본부의 인사참모로 영전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전에 신병교육대에 와서 나를 수색대원으로 차출해 간 그 인사참모였다. 신병교육대에서 나에게 바둑을 배웠던 교육대장과 삼사관학교 동기였던 그가 바로 김 상병이 말하는 그 소대장이었던 것이다!)

그 후 땅굴 작전과 무장공비 토벌 작전을 벌인 후, 우리가 GP에 투입되기 직전에 그는 또다시 영전되어 우리 중대 중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래서 우리 2소대는 옛날 소대장을 중대장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그것이 우리 소대의 경사라면서 큰 환영식을 열기도 하였었다. 중대장은 우리 소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신병교육대에서 자기가 나를 차출했다며 수색대 생활이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4. 다시 김 상병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소대장의 후원으로 GP에서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엄청나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입대 전에 교회에 출석하며 예배를 많이 드렸지만, 자기가 직접 예배를 인도하는 경험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설교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가 하는 설교가 소대원들에게 도통 먹히지 않았다. 소대장이 참석하고 후원하고 있으므로 소대원들이 마지못해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경건한 예배가 전혀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예배가 지겨웠다. 발언권이 있는 고참들은 수시로 조롱하며 예배를 빨리 끝내라고 압력을 행사했다.

또 설교 때 한 실수를 기억했다가 두고두고 놀림감으로 써먹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딴에는 전도한다는 사명으로 열심히 준비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예배를 계속 이끌고 가야했지만 감당이 되지 않아서 예배 시간만 되면 고문(拷問) 받는 기분이었다.

초신자로서 예수님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은 있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소대원들로부터 조롱과 놀림을 받는 처지에 이르자,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5. 견디지 못한 그는 이 일을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경계근무를 나가서 기도하는데, 기도할 때마다 너무 속이 상해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였다. 이 일은 자기로서는 너무나 역부족(力不足)임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설교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였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차라리 예배를 잘 인도할 수 있는 신병(新兵)이 오는 것이 해결책임을 알게 되었다.

신학교 다니다가 입대한 그런 신병이 우리 소대에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를 대신할 자격 있는 신병, 특히 설교를 잘 할 수 있는 신병을 보내달라고 100일을 작정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중대 본부에 있는 자기 동기 N 상병에게, 신학생 같이 예수 잘 믿고 학벌도 있는 신병이 오면 우리 소대로 보내달라고 신신당부(申申當付)를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GP에서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N 상병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소원대로 예수 믿는 신병이 하나 들어왔다. 서울대씩이나 졸업한 놈인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중대장을 설득하여 너의 소대에 배치했으니까 GP에서 내려오면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의 100일 기도가 응답 되었다는 확신이 들어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였단다. 내가 바로 그 신병이었다는 것이다! 

6.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내가 나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 수색대원이 되어, 강원도 양구 북방 GP에까지 오게 된 것이, 바로 이 사람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다니… 그의 간증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나 같은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다만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무슨 뜻이 있어서 이렇게 인도하시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었다. 그런데 김 상병의 100일간의 눈물로 드린 기도의 응답으로 내가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감정을 느꼈다.

과연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 맞구나, 라는 다행스러움, 동시에 이 사람의 기도 때문에 내가 이 생고생(生苦生)을 하게 되었구나, 라는 야속한 마음도 함께 들었던 것이다. 

7. 김 상병의 간증을 들은 그날부터 며칠 동안은 그것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과 김 상병 사이에서 나의 운명이 일정 부분 결정되었다는 이 느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우연히, 혹은 사람들에 의해서 내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개입하신다는 사실이 더욱 확실히 믿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곰곰이 이런 생각을 했다. ‘하나님께서 무슨 뜻이 있어서 나를 GP로 인도하셨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일단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군종(軍宗)사병도 들어올 수 없는 GP에 와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대학 다닐 때 선교회에서 3년 동안 말씀 훈련을 받은 것이 군대에서 이렇게 요긴하게 사용될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8. 이듬해 6월, GP에서 철수할 때까지 약 6개월 동안 열심히 예배를 인도했다. 주일에는 말씀(설교)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수요일에는 찬양과 기도 중심으로 꼬박꼬박 예배를 드렸다. 나는 GP에서 막내에 속했지만, 상당히 권위(?) 있게 예배를 인도하였고, 병장들까지도 잘 따라주었다. 그들은 나를 졸병이라고 막 대하지 않았고, 어느새 목사님이라 불러 주었다.

한 주에 최소 두 번의 예배를 드리면서 GP 내 분위기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사병들의 이야기 주제에 설교에서 들은 말이 많이 나왔다. 설교가 그들의 생각 속으로 침투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군대이므로 여전히 집합과 구타도 있었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하였다. 또 집합을 할 때에는 은근히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다. 집단 얼차려를 할 때도 미리 나를 외곽 초소에 경계근무를 나가도록 한 다음에 집합시키는 것이 그 한 예였다.

나를 위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느 정도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므로 의미가 있었다. 김 상병이 항상 모범을 보여 주었다. 김 상병은 그 GP에서 병장 계급장을 달았다. 김 상병은 나이가 나보다 어렸으므로 둘만 있을 때는 나를 인생 선배로, 멘토로 대접하며 신앙에 관한 것을 묻기도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전역(轉役)하고 사회에 나가면 나를 인생 선배로 깍듯이 모시겠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최태영 교수는 경북고등학교, 서울대 중문학과(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장로회신학대학원 대학원(Th.M. Th.D.)을 졸업했습니다.

美 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Research Fellow) 과정을 거쳤고, 1990년 3월~2020년 8월까지 30년 동안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영남신대 은퇴교수입니다. 또 '교회를 위한 신학 발전'을 위해 연구하는 '교회신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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