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최태영 교수의 '슬기로운 군대생활' 13편 'GP 생활의 애환(哀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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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최태영 교수의 '슬기로운 군대생활' 13편 'GP 생활의 애환(哀歡)'
  • 북한선교신문
  • 승인 2020.11.2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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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선교신문에서는 최태영 영남신대 은퇴교수(조직신학)의 군 생활 이야기를 담은 '슬기로운 군대생활'을 연재합니다. 대한민국 생활과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최태영 영남신대 은퇴교수(조직신학).
최태영 영남신대 은퇴교수(조직신학).

1. GP에서는 일상적인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매일 오전과 오후 2차례씩 물을 긷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틀에 한 번씩 GOP 통문(DMZ 출입문)에 가서 부식을 받아오는 일이다. 물을 길러러 가는 일이나 부식을 수령하는 일이나 모두 작전(作戰)이라고 하였다. 물조 또는 부식조로 조(組)를 편성하여 작전을 수행했다.

DMZ에서는 안전한 곳이 하나도 없으므로 벙커 안 내무반을 나가는 순간부터 무장하고 다닌다. 변소(화장실)도 벙커 밖에 있었으므로 용변을 보러 갈 때도 총을 들고 다닌다. 물조와 부식조는 DMZ 내 1Km 이상을 이동해야 하므로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2개 분대(分隊) 이상이 출동하여 1개 분대는 경계병으로 뛰는 것이다. GP 투입 초기에는 엄격하게 그 원칙을 지켰지만, 한 달쯤 지나면 대개 1개 분대만으로 작전을 뛴다. 경계와 작업을 함께 하는 것이다. 분대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을 든 채 물지게나 부식 박스를 지고 다니는 것이다. 

2. 제일 힘들고 지겨운 일은 물 긷는 일이었다. GP는 산꼭대기에 있으므로 물이 없다. 상수도나 지하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 마실 물이 필요할뿐더러,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도 하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소대장이나 고참들의 세수를 위해서도 여분의 물이 있어야 한다.

물이 얼마나 귀한지 GP 생활을 통해서 절감했다. 물을 긷기 위해서는 골짜기로 내려가야 한다. 다행히 역대 선배 수색대원들이 골짜기에 천연의 샘을 찾아놓았으므로, 그곳으로 내려가 물을 길어 오는 것이다. 나는 군 복무 중 3개의 GP를 전전했는데, GP마다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어느 곳이나 계곡 아래로 내려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무지무지하게 힘들었다. 

3. GP에 처음 투입된 때는 겨울이었다. 물 길으러 계곡에 있는 샘터로 내려가서 기온을 재니 영하 30도나 되었다. 군대 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한 추위였다. 샘은 꽁꽁 얼어 있었다. 힘센 고참이 근처에 있는 큰 돌을 가지고 와서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힘깨나 쓰는 병들이 힘자랑하듯이 교대로 내리치기를 여러 차례 하니, 드디어 구멍이 났다.

물바가지로 물을 떠는 데 걸리지 않을 만큼 구멍을 넓히고 얼음 두께를 재니 대략 30cm나 되었다. 가지고 간 약 10Kg 들이 물통에 물을 다 채우고 마개로 막고 물지게에 장착한다. 그런 후에는 각자 머리도 감고 몸도 씻었다. 두어 명의 고참이 옷을 훌훌 벗고는 바가지에 물을 떠서 머리부터 온몸에 물을 끼얹었다.

나는 살을 에는 추위에 엄두가 나지 않아 머리만 감았다. 몇일 동안 머리를 감지 못해 뒤숭숭했기 때문이다. 얼음 아래 샘물이 생각보다는 따뜻했다. 영하 30도 날씨에 30cm 얼음을 깨고 그 물로 머리를 감았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은 기억이 난다. 

4. 날이 좀 풀린 다음에는 물조를 나가면 으레 목욕을 했다. 물을 긷는 목적과 더불어 목욕탕에 가는 기분이었다. 물을 길어 물지게에 싣고 나면 옷을 홀랑 다 벗고 바가지에 물을 가득 떠서 머리부터 온몸에 끼얹고 때도 벗기며 씻는 것이다. 목욕탕에서처럼 서로 등도 밀어주면서 아무개의 신체 특징을 가리키며 잡담도 하면서 신나게 즐기는 것이다.

사실 거기서 그러면 안 되었다. 북조선의 무장한 군인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계병들을 세우고 교대로 목욕을 하였지만, 여러날을 지내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자 나중에는 경계병을 한 명도 안 세우고 다들 발가벗고 놀았다. 소심한 나는 전역할 때까지도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발가벗고 목욕하며 노래 부르고 춤추고 별 지랄을 다 떨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만약 북조선 군인들이 나타나서 ‘동작 그만’하고 총을 들이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빤스도 걸치지 못하고 손들고 북조선으로 끌려가는 광경이 상상되어 늘 불안했다. 그런데 2년 동안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5. 물 긷는 일의 가장 큰 어려움은 눈이 온 뒤였다. 눈은 지면에 닫자마자 꽁꽁 얼어버린다. 샘터로 가는 길은 오솔길이라 평탄하지 않았다. 특히 경사가 급한 난코스도 있었다. 샘터에서 볼 일을 마치면 각자 10리터짜리 물통 2개를 장착한 물지게를 지고 산꼭대기에 있는 GP로 올라가야 한다. 평소에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눈이 꽁꽁 얼어붙은 경사진 오솔길을 기어오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때는 대검을 꽂은 소총을 거꾸로 잡고 그것으로 얼음을 지피며 올라가는데,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고참들은 숙달된 솜씨로 잘 올랐지만 신병들은 헤매기 일쑤였다. 거기서 고참과 신참의 짬밥 차이가 여실하게 드러난다. 10m 남짓의 급경사진 난코스가 있는데, 지그재그 보법으로 거의 다 올라가다가 삐끗하여 물지게를 진 채 미끌어져 곤두박질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통이 건재하면 다행이지만 대개는 물통 뚜껑이 벗겨지고 물이 절반이나 쏟아지는 바람에 샘터에 다시 가서 퍼 올 경우도 있었다. 그때는 고참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 눈 온 뒤의 물조는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할 정도로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물조를 안 하려고 요리조리 요령 피우는 사병도 있었다. 

6. 물 긷는 것 외 일상적인 일은 부식(副食) 수령(受領)이다. 이것은 이틀에 한 번꼴로 GOP 통문에 가서 수령하는데, 물조와 달리 부식조에는 자원(自願)하는 사병이 많았다. 대개 고참들 서너 명이 꼭 끼게 된다.

그들은 은밀히 중대 본부와 거래를 하여 군대에서는 반입(搬入)이 안 되는 물품들을(고급 담배, 양주, 그림책 등) 몰래 들여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 모르게 수령하기 위하여 일찌감치 부식조를 지원하여 나가는 것이다.

부식조는 반드시 2개 분대 이상으로 편성하였다. 왜냐하면 GOP를 지키는 연대(聯隊) 초병(哨兵)들이 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GP는 사단 수색대가 맡지만 GOP는 연대 소관이었다.) 1개 분대만 갔다가는 초병들의 보고를 통해서 상부에 알려지면, 우리 소대장, 중대장은 박살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정대로 반드시 최소 2개 분대가 나가는데, 졸병들은 부식을 등에 지고 고참들은 은밀한 물품을 수령한 후 희희낙락하며 들어오는 것이다. 

7. 한 번은 부식이 아니라 주식인 쌀이 들어왔다. 이때는 가용병력 대부분이 나와서 쌀을 지고 날랐는데, 한 가마니가 60kg이나 되었다. 당시 나의 체중이 55kg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나보다 무거운 쌀가마니를, 지게도 없이 등에 지고 비탈길을 올라가야 했다. 기골이 장대한 보통의 수색대원에게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게 무지무지하게 힘든 일이었다. 나는 그 엄청난 무게를 지고 GP까지 어떻게 올라가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일단 지고 보니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리하여 통문에서부터 평지를 거쳐 살짝 내려가는 길까지는 근근이 지고 갈 수 있었다.

문제는 오르막이었다. 오르막에 이르자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몇 걸음 올라왔으나 더는 안 되었다. 일단 길가 바위 위에 쌀가마니를 얹어 놓고 잠시 쉬는 척했지만 속으로 절망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도저히 이것을 다시 지고 오르막길을 걸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체의 허약함을 탓하며 울고 싶었으나,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참으로 길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8. 그때 저 멀리 앞서가던 박 일병이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최 일병, 거기 가만히 있으라. 내가 다시 올 테니까.’ 박 일병은 나보다 3개월 정도 군번이 빠른데, 덩치 크고 힘도 센 데다, 일하는 지혜도 있고, 또 따뜻한 마음씨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소대 살림을 맡기로 예약된 고참인데, 그날 약골인 나를 안쓰럽게 여겨서 나의 쌀가마니를 대신 져 준 것이다. 어떻게 내 처지를 알고는 완전히 천사 역할을 해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그 일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내 입장을 배려한 것이다. 그는 나에게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렇게 하는 사람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조금이라도 수고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군대를 전역한 후에 여러 곳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나는 그와 같이 소탈하고 성실하고 남들에 대한 배려심이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박 일병 같은 분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진짜 대한민국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최태영 교수는 경북고등학교, 서울대 중문학과(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장로회신학대학원 대학원(Th.M. Th.D.)을 졸업했습니다.

美 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Research Fellow) 과정을 거쳤고, 1990년 3월~2020년 8월까지 30년 동안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영남신대 은퇴교수입니다. 또 '교회를 위한 신학 발전'을 위해 연구하는 '교회신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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